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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테레사: 빈민과 병자를 품은 자비의 손길, 사랑의 선교사로 산다는 것

by 뉴스픽100 2025. 5. 1.

마더 테레사는 가난·질병·죽음이 일상이던 콜카타 빈민가에서 인간 존엄의 마지막 촛불을 지킨 인물이다. 그는 알바니아 소녀 곤자 부야지우로 태어나 수도자의 길을 택한 뒤, 인도 철도역 플랫폼과 슬럼가 골목에서 한센병·결핵·에이즈 환자를 맨손으로 돌보며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를 향한 사랑을 실천했다. 정부·교회·국경을 초월해 확장된 ‘사랑의 선교회’는 창설 70여 년 만에 140개국 5천여 공동체로 자라났고, 하루 한 끼 죽이라도 dignitas(존엄)를 잃지 않게 한다는 신념 아래 의료·교육·임종 돌봄을 제공하고 있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그는 시상식 연설에서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 다만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할 뿐”이라며, 연단에 오른 여느 수상자와 달리 잔치 만찬 대신 빈민 구호 기금으로 상금을 전액 기부했다. 테레사의 생애는 단순 자선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을 목표로 한 공동체 복원 운동이었고, 오늘날 ESG·공정전환·치유경제 담론에서도 그의 섬김 리더십이 사례로 인용된다.

칼리굿 거리에 핀 작은 꽃: 사랑의 선교회 창설 배경

마더 테레사는 1910년, 오스만 제국령 스코페(현 북마케도니아)에서 상인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다. 18세에 아일랜드 로레토 수녀원에 입회해 ‘테레사’라는 수도명을 받고 인도 다르질링 선교지에 파견되었다. 당시 영국령 인도는 대규모 기근과 전염병, 카스트 차별이 맞물리며 도심 빈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었다. 1943년 벵골 대기근으로 300만 명이 숨지는 광경을 목격한 그는 “말이 아니라 손길로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라”는 내적 소명을 느꼈다. 1946년 9월 10일, 다르질링행 열차 안에서 체험한 ‘소명의 날’은 그의 인생을 두 갈래로 갈랐다. 기존 교단 학교 교사직을 내려놓고 거리로 나가 임종자를 돌보라는 강렬한 부르심이었다. 2년 뒤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사랑의 선교회’ 설립 승인을 얻은 그는 콜카타 칼리굿가에 첫 공동체를 열었다. 하얀 사리가루 띠만 두른 수녀복은 ‘단순함 안의 연대’를 상징했고, 일터는 늘 하수구 냄새 섞인 빈민촌 골목이었다. 테레사는 벽돌 부스러기와 낡은 스프링 침대로 20개 병상을 만들고, 길에 쓰러진 이들을 업어다 깨끗이 씻기고 상처를 소독했다. 오갈 데 없는 임종자를 위한 ‘니르말 흐리다이(순수한 마음)’ 집은, 누군가 최소한의 인간적 작별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공간이었다. 이 서론은 그가 왜 ‘빈자의 성자’로 불렸는지, 자선이 아닌 정의·존엄의 관점에서 이해할 실마리를 제공한다.

 

‘가난 속에서 만난 하느님’—실천·논쟁·확장

첫째, 실천. 테레사는 ‘작은 일에 담긴 큰 사랑’이라는 행위경제학을 전개했다. 하루 한 시간 거리 청소, 한 끼 식사 배식, 한 사람 상처 소독이 공동체 변화를 이끈다는 믿음은 행동 디자인 관점에서 ‘마이크로 해빗’ 모델로 재해석된다. 둘째, 논쟁. 지나친 고행주의·피임 반대·낙태 불인정으로 비판도 받았다. 1994년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고통을 낭만화한다”고 비판했지만, 테레사는 “가장 위험한 빈곤은 사랑받지 못함”이라 답했다. 그는 물질적 처우 개선뿐 아니라 관계적 빈곤 해소를 목표로 했기에 아픈 이를 꼭 안고 귀에서 이름을 불러주었다. 셋째, 확장. 사랑의 선교회는 재정 투명성과 현장 체류형 운영으로 비영리 거버넌스의 새로운 전범을 제시했다. 1980년대부터는 에이즈 병동, 지적장애 아동 요람, 노숙인 직업학교로 사역을 넓혔고, 긴급구호팀은 르완다 내전·코소보 분쟁 현장에도 투입되었다. 테레사는 UN, 세계은행, 다국적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어 ‘빈곤의 다중 원인’을 해결하려 했으며, 이는 오늘날 CSR·IMPACT 투자 모델과 연결된다. 특히 1997년 사망 당시까지도 그는 헌신적 현장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죽기 전 마지막 편지에서 “사랑은 계산이 아니라 관대함”이라고 썼다. 그의 본론적 궤적은 비판과 실패, 혁신을 모두 품은 역동적 서사다.

 

마더 테레사 이후의 세계,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질문

마더 테레사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지났지만, 빈곤·질병·고립은 여전히 글로벌 의제다. 우리는 그의 유산을 세 가지 층위로 계승해야 한다. 첫째, 관계적 포용. 테레사는 “손을 잡아 주는 데는 자격이 필요 없다”고 했다. 사회복지·보건 서비스에서 행정 편의를 이유로 대상자를 선별하는 관행은 ‘작은 사랑’부터 다시 검토돼야 한다. 둘째, 협업적 연대. 그는 종교·이념을 넘어 정부·기업·시민사회가 함께하자고 촉구했다. 오늘날 ESG 경영·SDGs 이행 평가에 사랑의 선교회 모델을 접목하면, 측정 가능한 인류애 지표를 설계할 수 있다. 셋째, 존엄 중심 혁신. 테레사가 들었던 청진기는 기술이 아니었고, 인간성을 듣는 귀였다. 디지털 헬스·원격 진료·AI 돌봄 로봇이 확산되는 시대일수록, 사용자의 존엄과 선택권을 설계 초기부터 반영해야 한다. “가난한 이를 보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기회”라는 그의 선언은 우리 각자의 생업 현장에서도 유효하다. 기부, 자원봉사, 임팩트 투자, 포용적 디자인 등 작은 실천이 쌓여야만 테레사가 품었던 슬럼가의 어린아이들이 ‘사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는 존엄을 누릴 수 있다. 결국 마더 테레사가 남긴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오늘 작은 사랑을 실천했는가?” 내 손과 시간, 능력을 들여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하는 순간, 그의 유산은 현재형이 된다.

 

마더 테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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